앤 설리번
조안나 맨스필드 설리번 매이시( 영어: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, 1866년 4월 14일 ~ 1936년 8월 20일 )
애칭하여 앤 설리번(영어: Anne Sullivan)으로 불리며 헬렌 켈러의 스승으로 유명한 미국의 교육가이다.
유년시절
앤 설리번의 부모는 토머스 설리번과 엘리스 클로헤시로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1847년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866년 매사추세츠 주 피딩힐스에서 앤 설리번을 낳았다. 앤 설리번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이었으며 간혹 그녀를 학대하였다. 그러나 앤 설리번은 아버지로부터 아일랜드의 전통과 풍속을 이어받았다. 그녀의 어머니는 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그녀가 여덟 살 되는 해 죽었다. 앤 설리번은 친척에게 맡겨졌다. 후일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와 남동생을 툭스베리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립 병원에 버렸다. 앤 설리번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결핵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며 보냈다. 그녀는 그들이 결코 해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남동생 지미는 곧 죽고 말았다.
시력상실과 회복
앤 설리번은 이미 다섯 살 때 트라코마에 감염되었고 해가 갈 수록 시각에 이상이 왔다.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이 질병은 자칫 시각을 상실하게 할 수 있었다. 툭스베리의 주립병원 의사는 그녀의 눈꺼풀을 고정시키는 힘든 수술을 통해 이 질병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. 후일 인근 병원에서 사목하던 로마 가톨릭 사제 바바라 신부는 그녀를 그의 병원에 대려가 재 수술하였다. 그러나 수술 전 마취를 위해 그녀의 눈에 코카인을 주입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녀의 시력은 더욱 나빠졌다. 바바라 신부는 보스턴 시립 병원으로 그녀를 대려가 두번의 재 수술을 하였으나 그녀의 시력은 사물을 흐릿하게 볼 수있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. 하는 수 없이 툭스베리에 돌아온 앤 설리번은 1880년 퍼킨스 시각장애학교에 입학하였다. 여기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하였다. 1886년 설리번은 시력을 회복한 상태에서 졸업하였으며 졸업생 대표연설을 하였다.
헬렌켈러와의 만남
퍼킨스 시각장애학원의 교장이었던 마이클 애나그너스는 앤 설리번을 헬렌 켈러의 교사로 위촉하였다.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에게 손바닥 위에 알파벳을 쓰는 방법으로 가르쳤다. 1888년 앤 설리번과 헬렌켈러는 퍼킨스 시각장애학교에 함께 등교하였으며, 그 후 함께 뉴욕의 라이트-허머슨 학교,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거쳐 래드클리프 대학에 진학하였다. 헬렌 켈러는 1904년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 후 앤 설리번과 함께 메사추세츠의 렌썸 카운티로 이주하여 후원 농장에 거주하였다.
1905년 앤 설리번은 평소 그들을 돕던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자 사회주의자인 존 메이시와 결혼하였으나 몇년 후 이혼하였다. 헬렌은 이들 부부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는데, 실제로 헬렌은 설리번의 추천으로 조지 웰스의 <신세계>(New World for Old)를 읽으면서 사회주의에 눈이 떴다고 말했고, 존 메이시의 영향으로 점자로 된 사회주의 문헌들을 읽었다. 이때문에 이들 부부는 마르크스주의 선전가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, 이에 대해 헬렌은 메이시 부인(설리번)은 사회주의자라고 아니라고 하였다.[1]1914년 이혼한 후 둘은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한 적이 없었다. 이후 헬렌 켈러와 함께 지냈으며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. 1936년 8월 20일 뉴욕주 포레스트 힐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.
'알면조은지식' 카테고리의 다른 글
다도 명상 (0) | 2008.03.27 |
---|---|
헬렌 켈러의 일생 (0) | 2008.03.26 |
해체당문화후기 (0) | 2008.03.25 |
공산당 사상개조후 표현 (0) | 2008.03.25 |
환율이 만들어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의미 (0) | 2008.03.25 |